35. 하나님 뵙기를 간절히 바람 창세기 28:10-22 10 - TopicsExpress



          

35. 하나님 뵙기를 간절히 바람 창세기 28:10-22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은 꿈을 받은 후 기다릴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꿈과 기다림은 참된 신앙의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을 밟으면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을 수 있는 수퍼맨들이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간교함과 비열함에 물든 천한 “야곱들”이다. 그럼에도 야곱은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고대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였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변화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라고 말씀하셨다 (롬 9:13). 한편, 에서는 자연인의 모든 악들과 덕을 보여주는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단 한번 태어난 것에 완벽하게 만족한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행복했으며 건강하였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반면 야곱은 반대였다. 그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였다. 하나님은 에서가 아니라 주님을 필요로 하는 야곱을 사랑하셨다. 자기 주장의 성향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창 28:20-22). 사람은 기도할 때 그 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야곱이 드리는 기도는 고결함이나 아름다움이 전혀 없는 자기 주장적인 기도였다. 그의 기도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었다. 자기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신경쓰지 못하고 있다. 야곱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부패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교훈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 어떤 상태인가를 바로 아는 것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육신”이라는 단어는 비종교적인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사람을 향하여 사용하고 있다. 육신에 속한 마음은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 안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순복하지 않는 자의 마음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7). 육신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롬 8:7). 육신에 속한 자들에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싫어한다. 따라서 성령을 따를 때에 맺히는 화평과 희락과 절제와 같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불편을 느낀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과거를 더 좋아하고 그리워한다.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진 기준과 관점을 버리기 싫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성령이 있으면서도 죄성을 해결하지 않고 안주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보다 오히려 약속을 잘 지키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이방 사람을 만나는 것이 훨씬 기쁠 때도 있다. 자기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자신 안에 갈등이 있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누구에게 나의 삶의 주권을 맡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육신 또는 성령 간에 하나를 택하여야 한다. 이때 문제는 성경에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처럼 우리의 삶을 내려 놓기를 꺼려 하며 핑계를 대는 점이다. 만일 하나님을 뵙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면 나는 내 안에서 자기 주장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분을 잃게 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우리 자신을 설명하고 변호하려는 마음으로 핑계를 대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살피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허락하면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서 자기-의지, 자기-주장을 몰아내신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과 다투어 씨름하는 영적인 “야곱들”이다. 이는 육신에 속한 모습이다. 한편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이는 변화된 성령의 사람들의 모습이다. 아무튼 야곱은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도록 씨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으로 인하여 그는 그의 남은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나도 내 멋대로 하겠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자기 주장을 하는 한 우리는 영적으로 나아갈 수 없다. 최고로 귀한 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창 28:12). 만일 요셉이나 다니엘 같은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비전이 임하였다고 한다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야곱처럼 비천한 사람에게 비전이 찾아왔다. 그가 꾼 꿈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간격이 무너지고 대화의 채널이 열렸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예표하는 비전이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 1:51). 이 비전의 유일한 실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 이후 주님께서 주장하시길 우리의 삶 가운데 이 꿈이 완성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 꿈의 상태에 있다거나,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현실 속에서는 하나님께 죽어있는 삶을 사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꿈과 현실이 연결되는 곳에 우리를 두셨다고 주장하신다.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이 땅의 지저분한 것 외에 더 높고 고결한 것에 사로 잡히는 것은 귀한 일이다. 또한 죽은 자같이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 야곱에게 임하였던 비전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큰 위로를 얻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다투는 야곱을 변화시켜서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 우리에게 부여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뵙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내 마음 속의 자기 주장을 신속히 버리고 우리의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도록 해야 한다. 영적인 갈망에 헌신함 창세기 28:19-22 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은 꿈을 꾸고 기다릴 수 있었다. 가장 큰 시험은 기다림이다. 정욕과 사랑의 차이는 바로 기다림이다. 정욕은 지금 당장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기다릴 수 있다. 정욕은 사람을 충동적으로 만들며 참을성이 없게 만든다. 따라서 정욕은 언제나 지름길을 택한다. 즉 당장 원하는 것을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무한하게 기다린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보았고 그분께서 나를 만져주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왔다면 나는 하나님을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 나는 확신 가운데 주께서 오실 것을 기다린다. 영적인 사람과 비영적인 사람의 차이는 기다릴 줄 아는 능력에서 판가름난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어머니의 가슴에 안긴 어린아기일 것이다. 어린아기는 어머니만 기다린다. 끝까지 기다린다. 우리도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어린아기처럼 하나님께로부터만 영양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어야 한다. 영적인 갈망의 시험은 나는 이처럼 하나님을 기다리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주님께 나를 맡기고 그분의 뜻대로 내게 뭐든지 하시도록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주님의 제자로 만드실 것이다. 이를 믿는가? 그렇다면 나는 주님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일하실 때까지 기다리며 메어달릴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찬이 된다. “성찬”이라는 의미는 일반적인 요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제 임재가 나타남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성찬에 관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일반적인 요소들, 곧 사람 관계, 공기, 바다, 하늘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제 임재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을 보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더 깊이 헌신하면 우리는 친구 관계 속에서, 평상시의 먹고 마시는 일에서 주님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교회에서의 성찬에 관한 교훈은 너무나 의식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다. 그래서 성찬이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인 생명”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을 통해서든 우리에게 오실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위대한 증표는 평범한 일들과 날들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지금 이곳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성찬에 동참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도움의 장소]
Posted on: Thu, 20 Jun 2013 20:0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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